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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ART IN CULTURE 2015.04.07 14:23 김일권展 1. 8~2. 4 뉴욕 실비아올드&포킴아… 인기글 ART IN CULTURE ExhibitionsHome › Online › Exhibitions 김일권展2015.04.07 14:23 ‘선으로부터’ 무한으로 김일권展 1. 8~2. 4 뉴욕 실비아올드&포킴아트갤러리/ 라울 자무디오(Raul Zamudio)  curator Liverpool Biennial, Venice Biennial〈2014.12.06〉 캔버스에 혼합재료 72×144cm 2015마크 로스코의 전의식적 색면회화부터 로버트 라이먼의 모노크롬으로 이어지는 예술적 궤적을 수용한 김일권의 초기 회화는 2개의 지배적인 색채로 가득 찬 직사각형의 캔버스로 이루어졌다. 그 두 색은 캔버스를 수평으로 양분하는 구획선에서 만나거나 그 언저리에서 뒤섞였다. 보다 확장된 방식을 도입한 그의 근작에서는 순수한 색면이 오프셋 컬러의 간섭을 받아 흐릿한 화면에 촉각적인 색채를 통한 깊이감이 더해졌다. 이 회화들이 순수한 추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캔버스의 넓은 색면을 가로지르는 구획선은 하나의 수평선으로 지각된다. 그렇다면 김일권의 작업은 형식적, 개념적 차원에서 추상과 재현, 형상과 배경, 현존과 부재, 존재와 무의 대립항들을 계속 오가는 일종의 변증법적 회화라 말할 수 있다.〈2015.01.26〉 캔버스에 아크릴릭 56×76cm 2014이번 전시에서 김일권은 그의 이전 회화들을 전혀 다른 개념적 방향에서 취합한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양분하는 선을 지닌 형식적 기법을 유지하고 있지만, 신비롭고 관능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불투명한 막으로 그 표면을 덮었다. 이 신작들이 추상화된 풍경으로 여겨진다면, 이 표면 효과는 캔버스에 깊이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재현과 추상 사이의 긴장을 고양시키는 어떤 안개를 창조해 낸다. 물론 그 안개는 형식적 기법이지만 여기엔 이 모노크롬의 분위기에 스며든 어떤 의미도 있다고 여겨진다. 또 다른 작품들은 덜 추상적으로 보인다. 그것들은 각각 다른 색채의 배경 위에 검은 나무의 이미지가 그려진 2점의 작품이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를 연상시키는 이 두 회화가 환기시키는 것은 불길한 정조가 아니라 잘려나간 나무의 멜랑콜리와 파토스다. 작가는 침착하고 능숙하게 자연은 전혀 자연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자연이란 문화가 붙여 준 이름일 뿐이고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가 사회적 함의를 들먹이며 예술적 상대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의 회화 속 나무에는 감성적이고 시적인 정취가 가득하다.〈2014.12.27〉 하드보드지에 유채 72×54cm 2014이번 전시에서 형식과 개념 면에서 가장 야심 찬 작품들은 혼합매체 작품들이다. 숲 속의 나무라는 모티프를 지속하고 있지만 배경은 회색이며 두꺼운 백색 선이 중첩돼 있다. 인쇄된 캔버스에 그려진 나뭇가지 이미지로 이뤄진 이 작품들에 끼어든 백색 선은 다소 환각적이며 또한 그만큼 개념적이며, 나뭇가지와 흰 선은 서로를 상쇄하지만 하나의 구성을 이루며 무리 없이 어울린다. 기이한 방식으로 김일권은 이전의 회화적 전략을 역전시켜 다시 취하는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궤적을 그려 낸다. 즉 이전의 작품들이 먼저 순수 추상의 영역으로 나타난 후 수평선을 지닌 풍경으로 번져 간다면, 위에 언급된 이후의 작품들은 단호하게 재현적인 것에서 출발해 무정형적인 것으로 변한다.요컨대 전시에 선보인 작품들은 ‘선에서부터’라는 수수께끼 같고 열린 결말을 지닌 전시의 부제를 잘 구현하고 있다. 김일권은 그리는 행위의 역사적 양식들을 재구성해 나감으로써 회화에 활기를 불어넣는 새롭고 신선한 방식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이런 시도는 분명 라스코 동굴에 그려진 선에서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선에서부터 출발한 김일권의 시도가 이제 가닿는 곳, 그곳은 바로 무한일 것이다.  김일권 07-13
17 Daydreams of Infinity 뉴욕파슨스 디자인대학 학장 미술사 박사-- Rosemary O’Nei… 댓글(댓글 :206) 인기글 가스톤 바첼라드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공간의 시학”(1958)에서, 공간과 시적 사상간 관계를 규명하는 그의 현상학적 접근방법이 정신의 삶과 우리의 비전의 세계를 구분하는 인위적인 경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명상적인 백일몽은 “무한성의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며”, “친근함과 방대함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시와 예술에서 구성될 수 있다고 한다. 예술가는 개방적인 상상력으로 일상생활의 세속성과 일시적인 상태를 초월하여 정신이 감지하는 어떤 표현할 수 없는 지각에 동화될 수 있다. 공간 시학에 관한 바첼라드의 견해는 김일권의 회화에 매우 적절하게 적용된다.색채가 양분된 김일권이 캔버스는 계절적인 변화 리듬에 의해 미묘하게 조절된 랜드스케이프를 환기시킨다. 김일권은 캔버스의 반복적인 포맷에서, 자신의 작업을 동서양의 낭만적으로 초월적인 예술가와 시인들의 역사와 결부시키는 예술적인 확신을 보여준다. 우리의 물질주의적인 세계에서 더욱 더 분리되고 있는 육체와 정신의 이중성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안정적이고 가변적인 경험에서는 여전히 그 구분이 흐릿할 수 있다. 김일권의 회화 언어는 인식가능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공간에 대한 모더니스트의 열망에 집착한다. 그의 회화는 그의 선언대로 보다 깊은 내용의 전달을 추구한다. “나의 이미지는 표현적 미니멀리즘의 분위기로 가득차 있다; 이들 이미지는 조형적 연습으로 읽혀질 수 있을 만큼 평이하기 보다는 자연을 담고 자연 속의 질서를 만들기 위한 정서적인 현실인 내용이 있는 주제들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정신 속으로 넌지시 암시하는 침묵의 해소가 있다 - 이러한 해소는 인식가능하고 표출가능한 직관적인 실천이다; 김일권은 기억을 열망으로 구성한다.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에는 일정한 연월일로 표시된 제목이 있다 - 온 카와라와 같은 작가들의 엄격한 개념주의와 구분되는 기록된 감각의 시각적인 일기이다. 김일권의 작품에는 그의 표현 방식이 지배하는 시간이 있다. 그의 작품은 정보 전달 모멘트의 즉시성에 대한 반명제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시간을 지향하는 의사소통과 단조로움을 피하는 명료함을 본다. 김일권의 작품들은 컬러 빛이 풍부한 표면에 의해 형성되고 미묘한 바탕 그림 켜에 의해 완성되는 깊게 공명하는 에너지에 관한 시각적인 경험에 침투하는 어떤 것도 배제한다. 또한 바첼라드는 “지평선에 의존하는 공기로 숨쉰다”라고 선언한 방대함에 대한 샤를르 보들레르의 개념과 관련하여 공간의 친근함과 방대함의 공존을 생각하였다. 관객에게 부드러우면서 효과적인 시각적 활력을 제공하는 것은 김일권의 작품에 편재하는 지평선이다. 김일권의 작품에는 어떤 영적인 낙관주의가 있다 - 그것은 마음이 물질과 유한성이 잠깐동안 나타나는 곳을 감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 관계의 시이다.김일권의 고요한 세계 ,, 양은희 (미술사 박사) 뉴욕시립대 김일권의 고요한 세계 양은희 (미술사 박사) 뉴욕시립대1.   미술과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같은 몸인데 다른 얼굴을 보일 뿐이다. 이미 지난 세기동안 미술의 역사는 이 동전의 앞뒤와 같은 삶과의 관계를 인정했으며, 삶을 벗어난 미술은 무의미하게 말장난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40, 50년대 그린버그가 맹신했던 형식주의 미술은 인간의 삶을 배척하고 ‘미술을 위한 미술’을 주창했지만 그것의 운명적 종착점은 결국 물감과 캔버스였다. ‘회화를 위한 회화’는 재료를 물신화하게 되었고, 결국 재료의 한계 내에 봉착하고 말았다.   미술은 일상의 일부이며, 삶과 병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아 ‘무엇이든지 미술이 될 수 있다’는 식이 한 가지이고, 또 하나는 온 카와라처럼 진지하게, 삶을 받아들이며 일상을 기록하는 태도이다.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작가, 특히 앨런 카프로우, 클래스 올덴버그는 현대사회의 폐허물과 잔여물을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와서 삶의 흔적을 예술적 언어로 포장했다. 반면에 온 카와라는 자신의 삶의 세세한 변화를 조용하게 기록해왔다.   카와라는 아침에 일어난 시간, 신문에서 읽은 기사, 낮에 만난 사람 등을 하나하나 일기처럼 적는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일 외에도 ‘날짜 회화’ 또는 ‘일일 회화’라고 불리는 그림을 그리는데, 이 그림그리기는 그의 하루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모노크롬 캔버스를 테이블 위에 펼치고 위에 그날 날짜를 흰색으로 그래픽처럼 그리는 것이다. 하루에 한 작품을 그릴 수도 있고, 물론 몇날 며칠이고 아무런 그림도 그리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또 물감과 캔버스를 꺼내든다. 마치 며칠 동안 먹지 않았던 찌개를 끓여 먹듯이 다시 습관적 일상으로 돌아온다.   김일권은 카와라처럼 일상과 작업을 분리하지 않는 작가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회화에 그의 일상이 오롯이 녹아있다. 카와라처럼 그림의 제목에 그림을 그린 그날 날짜를 사용하는 것도 비슷하다. 간결한 수평선 하나가 캔버스 가운데를 가르는 그림으로 잘 알려진 김일권은 카와라처럼 비슷한 그림을 반복한다. 물론 색과 캔버스의 크기는 변하지만, 수평선 또는 수평적 구도로 화면을 가르는 추상 패턴을 반복한다. 그가 최근에 일관되게 그리는 수평적 색면은 사실 그가 사는 순천 앞바다 풍경을 캔버스로 담은 것이라고 한다. 순천. 서울에서 비교적 먼 이 곳의 일상은 여느 지방 도시처럼 느리고, 적막하며, 가끔 만나는 친구의 방문이 반가운 곳일 것이다. 그러나 서울처럼--아니면 카와라가 여행한 세계의 여느 도시에서처럼--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취침하는 일상이 반복되는 곳이기도 하다. 반복과 일상. 일상의 반복. 삶은 이 순환고리 속에서 느리게 그리고 인내를 통해 지속된다.   김일권은 카와라처럼 한 도시에만 사는 붙박이 작가는 아니다. 뉴욕을 거점으로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카와라는 사실 집 (house)이 있으면서도 집 (home)이 없다고 말한다. 김일권은 광주, 서울, 도쿄, 파리, 뉴욕 등 이미 여러 도시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뉴욕에서 미술을 공부하면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외국으로 자주 나간다. 그가 글로벌한 미술계를 두루 섭렵해왔다는 면에서 카와라와 비슷하다. 하지만 카와라는 고국인 일본의 언어를 작품에서 축출해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여정에서 마주친 언어로만 작품을 만든다. 심지어 일본어 대신에 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한 지역, 한 나라의 시민을 넘어서 ‘세계시민’이고자 애쓰는 작가이다. 김일권은 먼 나라로 여행을 다녀오더라도 자신의 회화에서 고향의 풍경을 고수하고 있다. 그에게 ‘세계시민’이란 명칭은 고향의 냄새와 비교해서 더 매력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고향의 바다. 그 원초적인 감각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그래서 묵묵히 그 바다를 그림에 담는다. 그건 인간으로서 그의 존재이유이자 미술작가로서의 존재이유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순천에서 사는 그의 일상이다. 오래 전부터 순천 사람들이 바다를 보면서 삶을 그렸듯이, 그도 바다를 보면서 삶을 그린다. 서울로, 그리고 뉴욕으로 아니면 다른 외국의 도시로 돌아다니더라도 그 일상은 이미 그의 존재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2.이런 이야기가 있다. 오래전, 아직 예술과 과학, 철학과 과학이 분리되지 않던 시절,  고대도시 바빌론에는 인근 지역에서 몰려온 지성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Adherents of Legominism”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구상에 거주하는 뛰어난 학자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로 발전되었다. 그들은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최고의 지식’을 얻음으로서 ‘자아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모여든 학자 중에 Aksharpanzia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어느 날 이 모임에서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안전하고 정확하게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면 인공적인 물건을 만드는 것 (즉 예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그 만들어진 물체를 통해서 후세가 지식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각적 물체는 한 세대의 성과를 후대에 보여주는 증거로 삼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의 연설을 듣고 고무된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보여주는 물건을 만들어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여러 사람의 머리와 손을 거쳐 나온 물건이었기에 당연히 다채로운 색, 형태, 기능을 가진 것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도 만들어온 물건이 너무 많아서, 한 번에 전시를 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효과적으로 운영하고자 불가피하게 여러 날에 걸쳐 전시를 하나씩 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시에 따라 물건을 분류해야 했는데, 시간에 따라, 그리고 종류별로 물건을 나누어야 했다. 그래서 전시는 일주일로 늘어났고,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날마다 다른 종류의 물건을 전시했다. 화요일은 건축 작품을 전시하는 날이었고, 수요일은 회화작품을 전시하는 날이었다. 이렇게 나누다보니 덩달아서 물건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효율적으로 분류하게 되었다.   이 전시는 당시 바빌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인간의 지각이 많이 쇠퇴하고 있어서 이를 믿을 수 없던 차에, 다양한 시각적 물건이 쏟아져 나온 것을 보고, 내친 김에 감각 중에서도 중요한 시각의 영역에 속하는 색채를 연구하기로 한다. 특히 흰색과 검은 색 사이의 다양한 채도를 이번 기회에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들의 의식이 고양되고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감각을 되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한때 화가들은 회색에서 1500개의 다른 채도를 찾아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각의 섬세함을 탐구하다보니, 예술은 처음에 지식의 세계에서 출발해서 감각의 영역과 연결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신비주의 철학자이자 종교이론가인 구르지예프의 철학적 소설 <Beezelbub's Tales to His Grandson> (1950)에서, 주인공 빌제법Beelzebub이라는 이가 자신의 손자 하세인Hassein에게 전해준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온 카와라가 좋아했던 작품이다. 바빌론 사람들이 한 일은 무엇일까?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요점은 이렇다. 인간의 삶은 자아를 발전하면서 완성된 삶을 산다. 그래서 ‘최고의 지식’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을 개인을 넘어 다음 세대에 지혜와 물려줄 의무가 있다. 바로 그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이 예술을 성취하는 과정과 같다. 삶과 예술의 일치가 여기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지식을 보여줄 시각적 증거로 나온 것이 바로 시각예술품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지식은 너무도 많은 시각적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보기 좋게, 이해하기 좋게, 그리고 인간이 누리는 시간 제도에 따라 분류할 필요가 생겨났다.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 감각의 영역과 지식의 영역이 처음부터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분리된 영역들이 생겨난 것이다. 바로 근대사회에 들어와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고대로 돌아가 보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가 보면, 인간의 삶은 예술과 괴리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예술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감각, 경험, 지식, 그리고 존재는 전달하는 것이다. 캔버스와 물감은 그것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카와라는 이 이야기에서 자신의 미술작업의 근간을 확인하고, 평생 동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기록하고, 이를 전달하고자 반복되는 과정을 살아왔다. 그는 19세에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사회 제도가 만든 어느 직업도 거부하고 오로지 예술가라는 고대부터 전해온 길만을 걷는다. 굶주림과 두 아이의 아버지라는 현실도 그 길을 멈추지 못했다. 1960년대 중반 이런 깨달음을 얻은 이후로 매일 그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스스로 깨달음에 도달한 그는 바로 “Adherents of Legominism”의 현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삶과 예술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김일권도 그 길을 가고 있다. 순천 앞 바다를 보면서 꾀를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그리고 가끔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면서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3.   김일권은 주로 바다, 산, 대지의 풍경을 그려왔다. 2003년경부터 등장한 풍경은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연에서 점차 추상적인 자연으로 변해갔다. 그런 중에 바다와 땅이 융합되고, 하늘과 대지가 서로 혼동되면서 이제는 바다 풍경인지 아니면 마음의 풍경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이다. 세계의 추상 미술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잘 아는 그가 이미 보편적인 미술 언어로 인정된 추상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가 뉴욕에서 거주하면서 알게 된 비평가들--로버트 모간, 로즈메리 오닐, 탈리아 브라초플러스--은 한결같이 그의 작품에 보이는 자연의 보편적 미와 공간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마크 로스코와 같은 정적인 그러면서도 초월적인 추상의 미를 추구했던 미국 작가와 비교하고 있다. 김일권의 작품에 로스코의 팔레트가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로스코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본다. 1950년대 이후 한국에서 전개된 추상 전통을 그가 모를 리 없다. 덩어리들이 엉킨 역동적 추상작품에서, 선의 반복적 활동을 담은 미묘한 모노크롬 회화까지, 김일권보다 앞서서 추상을 다룬 작가들을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는 동서양의 회화 전통을 공부한 사람이다. 초현실주의적인 생명체를 그리다가 이런 형체들을 추상화하면서 결국에는 부드러운 색면이 부유하는 추상을 통해 정신적인 주체를 표현했던 로스코의 추상과 외양은 비슷할지 몰라도 출발은 다르다. 김일권은 바다, 밤, 하늘, 땅과 같은 넓은 우주를 차근차근 그려서 결국 정련된 추상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형태만 정련한 것이 아니라, 붓의 움직임, 색채의 사용도 점점 절도있게 변해왔다.   김일권의 풍경은 단순한 수평 구도와 한두 가지 색을 이용한 모노크롬 색면의 결합을 통해 아직은 완전한 추상이 아니라, 푸른 바다와 척박한 대지가 서로를 포용하는 순천 앞바다 풍경이 정련되어 고즈넉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남해안에 자주 부는 비바람의 흔적조차도 수평선이 무너지는 안개 속처럼 그려진다. 푸른색과 붉은 색일 수도 있고, 녹두색과 갈색이 결합할 수도 있다. 수평적 구도에 가로로 뻗은 줄 하나, 둘이 화면을 가른다. 그리고 그 바다와 대지가 서로 녹아들어 가는 수평선은 그의 풍경에서 사실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둘이었던 색이 하나가 되는 지점이자, 하나였던 색이 둘로 나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의 풍경이 보여주는 드라마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수평선은 의도적으로 단순한 선 하나, 아니면 해안선과 같은 돌출된 부분이 느껴지는 선도 있다. 그 수평선이 갈등 관계를 극복한 듯이 소박하게 서로 어울리기도 한다. 이 선은 그의 그림이 완성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1년 365일, 태양과 달, 구름과 바람이 예고도 없이 매일 찾아오는 곳. 변화무쌍한 낮과 밤을 보면서도 김일권은 바람, 돌, 나무, 파도도 숨을 죽인 곳과 때를 골라 캔버스에 담았다. 그 숨죽임 가운데 드러나는 고요함이 남도의 여유로움인지 아니면 척박한 땅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시간 속에서 잊고자 하는 망각의 노력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물감이 지나치게 두텁지도 않고 얇지도 않은 것, 붓 자국이 절제되어 정직하게 움직인 것은 분명히 평온함을 담고자 한 흔적이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도도함이 엿보이는 것은 어쩌면 고향의 바다 앞에 서서 역사의 고통과 현세상의 흐름을 잊고, 더 큰 우주의 흐름 속에 자신의 존재를 맡기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고요의 땅. 그가 한때 사용하던 제목은 요즈음 사라졌지만 처음에 그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를 보여준다. 그 땅을 번잡스럽게 하는 인간과 혼잡한 감정의 교류, 욕망의 경쟁을 축출해버린 곳.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가 스치는 곳. 고요함은 문명과 먼 김일권의 영토를 정의하는 개념이다. 그곳은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곳이거나 아니면 그가 사람을 피해 온 곳일 것이다. 스스로가 먼지 한 톨처럼 느껴지는 넓은 대지와 그것을 에워싼 바다. 그런 영토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그는 그 생각과 느낌조차도 차단해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고요의 땅’이라는 제목은 사라지고 그가 그림을 그린 날짜만 제목으로 사용한다. 그는 이렇게 중성적인 제목을 통해 모든 연상, 추측, 그리고 가정을 막고 대신에 그림에만 집중하게 한다.   2005. 11. 20, 2006. 01. 20, 2006. 02 .01, 2006. 02. 02, 2006. 03. 30, 2006, 04. 02, 2006. 06. 10, 2006. 10. 29, 2006. 10. 30, 2006. 11. 21, 2006. 12. 31, 2007. 01. 25............................................................................................................................................이 숫자는 김일권이 작품 제목으로 사용한 것들이다. 그가 그림을 완성한 날의 날짜를 그대로 제목에 사용했다. 하루, 그리고 또 하루, 그리고 또 하루. 그림 한 점을 완성하려면 족히 한 달을 보내는 그는 마지막 날에 그림 제목을 정한다. 그 작품이 만들어질 때까지 흘러간 시간은 모두 그 제목에 들어간 날짜로 응축된다.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면서 선조가 쌓은 지혜를 전해주려던 할아버지 빌제법, 바빌론에서 후대에게 지식을 전달하고자 애쓰던 지식인들. 날마다 자신이 그림을 그린 날의 날짜를 캔버스에 그리는 카와라. 김일권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알고 있으며 자신에게 부여된 그 역할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 2006년 1월 20일...........2006년 2월 1일. 2006년 2월 2일.......2006년 3월 30일...2006년 4월 2일..............2006년 6월 10일........................2006년 10월 29일..2006년 10월 30일.............................2006년 11월 21일..............................................................................................................................................이 무수한 점 속에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은 인간의 일상을 삼키고, 고요히 흐르는 바다처럼 흘러간다. 어수선한 세월도, 번잡스러운 시간도, 영광스러운 순간도 모두 그 시간의 바다에 묻힌다. 그리고 작가도 묻힐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작가를 사라지게 하더라도 작품은 그 시간 속에서 지속된다. 바빌론에서부터 그랬듯이. 김일권 08-21
16 Thalia Vrachoplus Ph.d ,뉴욕시립대학교 미술사 교수. 2005 NYArts, 인기글 Phantasmic and Other Landscapes로버트 모건 ( ROBET C MORGAN )이쓴 김일권 : 새로운 풍경이라는 리뷰에서 모건은 이작가의 앞으로의 행보는 예측할 수가 없다고 적고 있다. 그는 또 김 일권의 작업을 재현도 아니고 추상도아닌 그둘을 혼합한듯한 스타일에 대해서 자연스러워 보이면서도 서로조화를 이루고있다고 지적한다.  김 일권의 작품이 추상인것이 사실이지만, 그 작업은 마치 제우스의 머리에서 아테네가 생성된것처럼 작가의 농익은 상상의과정을겇 거쳐 환원된 결과물로서의 추상일것이다.재현적인 풍경화가 특정장소와 계층 혹은사회적으로 관련있는 내용을 강력하계 시사하는 도구라면, 김일권의 연상적인 풍경은 그안에서 희망을 꿈꿀수 있는 장소,현실의 지역과 도시에 대한 대안적인 공간 ,또 무엇이든 가능한 공간이다.전통적인 풍경화는 때론 장식적이라는 말로 치부되어 왔거나, 그내용에 있어 정치적, 시대적 이데올로기로 가득찬 사회적 암호로서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김 일권의 풍경화는애초에 풍경이 작가의 독립적인 표현과 작품제작을위한 공간임을 강조라도 하듯이 개념적인 개념적인 의미와 작가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으로 밀도있게 구성되어 있다.비록 환경이나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보는 이로하여금 희망의 가능성을 가지게 하면서 인본주의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충분히 사회적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김 일권의 풍경화는 시간성을 초월하고 환영과 같은 느낌을 주지만, 02 28 05, 02 20 05 같은 제목을 단 작품의 경우는 날짜를 제목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온카와라의 특정한 날짜를 표기한 회화 작업과도 연관이 있다.  시간이라는 요소가 김 일권의 풍경화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능을하고 있기는 하지만,온카와라의 경우는 날짜가 적힌 그의 회화를 그날짜에 맞춰 완성하거나 파괴해 버린다는 점에서 김 일권의 작업과는 차이가 있다.김 일권에게는 그특정한 날짜는 그풍경이 숭고해지도록 맞춰진 가상의 시간에대한 기록으로서, 작가 자신의 요구에맞춰 연장된 시간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로버트 모건,NY ARTS 2005년 5월호 PP 86-87 김일권이 새로이 선보인 회화는 일전의 작업에서 발전하여 한층더 부드러운 녹색과 자줏빛 등이 매우정교하게 섞여 부드러움과 몽한적인 아스라함을 전달한다. 그의 작업 05 20 03, 05 20 2005에서보면 하단의푸른색은 엷은 노란색과 섞여 화면전체에 부드러운 녹색을 만들어내고 있다.모내가 풍경에서 보이는 빛의 효과를그의 방식으로 화면에 전달하려고 한것처럼,작가 김 일권이 색을 사용하는데 있어 그날의 특정한 날씨나 빛을을 고려하여 구체저으로 전달하려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그는 풍경화를 통해 작가 자신속에 존재하는 장소와 시간을 표현하려하고 있다.그의 색채화를 통해 알수있듯이 김 일권의 작품방향은 어쩌면 매우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즉 숙달한 색채표현으로 시적인내용을 다룬 그의회화에서 사그라지지 않는 예술에 대한 작가의 헌신과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다. 김일권 08-21
15 김일권의 새로운 풍경화 - Robert C. Morgan art critic may 2005 NY ARTS 인기글 풍경화는 여러 세기 동안 화가들의 끊임없는 테마였다. 풍경화는 동양문화에서도 서양문화에서도 오랜 동안 회화에서 하나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오늘날은 과거와는 달리 동양문화와 서양문화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다. 현재와 같은 문화의 세계화 시대에는 새로운 종류의 종합이 나타나고 있다. 풍경화를 그리는 방법에 있어서는 동양과 서양이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지만, 새로운 개념과 방식들을 고찰하고, 이해하는 수단은 어느 때 보다도 근접해 있다. 동양과 서양의 예술적 표현에 대한 우열을 가리는 풍조는 줄어들었고, 공통적인 목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풍경화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여서, 순수히 구상적인 혹은 언어적인 현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신-형이상학적인 현상으로서의 의미를 띄게 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특별히 한국의 김일권의 작품을 논의하고자 한다. 김일권의 작품을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하려면, 풍경화에 대한 통상적인 관념과 이해를 넘어서야 한다. 김일권의 풍경화는 추상화와 바로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풍경화는 구상과 추상 사이의 연결점이며, 지렛대이고, 저울의 균형대이며, 미래를 투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고요한 땅"이라는 그의 연작은 일종의 예언적인 지진계이며, 의도적인 계산을 배제한 경고이며, 자신에 대한 사고와 감정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김일권은 풍경을 보는 행위가 내재적인 형이상학적 행위이며, 자연의 실재와 화해를 하는 길이며, 수평선의 무한을 느끼고, 자아의 고요, 고독, 공포와 탐욕으로 갈라 진 세상 속에서 영적 존재의 무한한 장려함과 화해하는 길임을 이해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과거와의 관련성 속에서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동양 풍경화의 전통인 간명한 고요함, 모호함이 없는 의미, 담대한 이해력과 사유의 감정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적 정서의 우주를 발견할 수도 있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때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는 은하수의 분위기를 발견할 수도 있다.   화랑의 이곳 저곳을 돌면서 진지한 지적 각성이 예리한 정서와 만나게 되는 어떤 전환점, 통찰, 위안을 찾던 필자는 하나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어가 적혀 있는 그 작품에는 황갈색과 황토색이 혼합되어서 흑백의 들판이 되며, 지평선이 대지와 그 보다 넓은 하늘을 갈라놓고 있었다. 그 작품은 ‘고요한 땅 (12.07.01)’이었다. 그 순간 나는 1970년 말보로 화랑에서 (화가인 로버트 마더웰의 추천으로) 보았던 고인이 된 로드코 (Rothko)의 연작을 떠 올렸다. 그 화랑에는 강력하고 단순한 로드코의 그림이 지아코메티의 가냘프게 표현된 형상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곳 뉴욕의 한국 화랑에서 나는 비슷한 현상에 직면했다 - 그 그림은 30여 년 전에 내가 경험했던 바를 포착하고 있었다. 김일권의 그림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작아졌고,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전환은 다른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로드코 작품의 엄청난 기교는 김일권의 작품과는 다르다. 김일권의 작품들은 더 작고, 보다 미묘하며, 어떤 점에서는 보다 힘차고, 보다 자발적이며, 덜 간절하며, 덜 절망적이다. 그렇지만, 김일권의 그림은 어쩐 일인지 긴장감을 드러내며, 막 일어나려고 하는 어떤 것 - 어떤 사건 -을, 혹은 지금 막 벌어진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다. 고요한 땅 연작의 각각에는 지평선, 땅과 하늘, 그리고 양분되어진 실재와 화해하려는 욕망이 있고,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인간 경험을 암시하는 보이지 않는 실재, 즉 예술작품이 되는 순간에 감상자의 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감동에 변증법적으로 접하려는 욕구가 있다.필자는 다시 바라본다 - 이번에는 또 다른 위안을 제공하는 작은 추상 풍경화 ‘고요한 땅 (01.12.01)’을 바라본다. 김일권은 각각의 그림에 제목을 붙이기보다는 숫자를 먹이고 있다. 마치 그 작품들이 하나의 시공간의 일부분들인 것처럼, 또, 모든 것을 이 땅의 지평선으로 영원히 돌아가게 하는 중력의 힘이 지배하는 상대적인 세계의 일부분들인 것처럼. 풍경화에는 거의 변조가 없고, 지평선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표시도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붓의 놀림 - 하늘과 관련지어 땅의 풍경을 표현해 주는 붓놀림의 방법을 깨닫게 된다. 땅에 있는 검정빛, 하늘에 있는 자주빛과 노란빛의 혼합은 빛이 막 저물었거나, 혹은 막 피어오르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작품엔 어둠과 빛이 지나가고 있다. 장엄한 정적, 깨어남, 순간에서 순간으로의 전환이 있다. 소리도 영상처럼 뚜렷하다. 자매편으로 여겨지는 작품 ‘고요한 땅 (11.27.00)’에서는 하늘에 빛이 들어오고, 땅은 하루의 일상에 손짓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움직거림, 여행, 반복하는 일상에 참여하는 활기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풍경화들이 이끄는 방향을 예견할 수는 없다. ‘고요한 땅 (01.05.00)’에서는 바다의 파도에 대한 예리한 감각이 밤을 관통하고 있다. 감상하는 사람은 바닷가의 그 어딘가에서 숭고하지만 엄청난 이 자연현상을 바라보게 된다. 수평선은 동요하고 있다. 단순하고, 난해하고 서예와 같은 붓놀림은 전형적이던 정적을 교란하고 있다. 우리는 바다의 앞에서 있다 - 그런데 그 바다는 순수한 표상이 아니라, 자연 속의 어떤 보편적인 것을 암시한다. 그 결과, 회화에 있어서의 구상적인 요소와 추상적인 요소 - 둘 다 자연에 속한다 -를 모두 끌어 당겨, 서로가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다. 김일권은 감상자로 하여금 지각의 대상이 주는 느낌에 눈을 뜨게 한다. 객관적으로 변화하는 자연, 갑각류처럼 굳은 형식으로서의 자연, 우리를 자아로 귀향케 하고, 어둠이 빛으로 전환하며, 우리가 다시 전체가 되는 그런 영혼의 텅 빈 지대로 귀향케 하는 원초적인 사건으로서의 자연에 눈을 뜨게 한다. Robert C. Morgan is a writer, international art critic, curator, poet, lecturer, and artist. His recent books include Art into Ideas: Essays on Conceptual Art (1996), Between Modern and Conceptual Art (1997), The End of the Art World (1998), Gary Hill (2000), Bruce Nauman (2002), and Clement Greenberg: Late Writings (2003).  He writes for Art News (New York) and Art Press (Paris) and is a Contributing Editor for Sculpture Magazine (USA) and Tema Celeste (Milan).  He holds both an MFA in Sculpture and a Ph.D. in Art History.  He is currently adjunct Professor of Fine Art at Pratt Institute.  In 1999, he was awarded the Arcale Award for Art Criticism in Salamanca. 김일권 08-21
14 Clinton Kuopus (클린턴 쿠어퍼스) 교수 - 뉴욕 파슨스 디자인 대학 미술관 관장 인기글 Eel Kwon Kim "a painter's painter"김일권은 풍경..... 대기 그리고 대지에 관한 추상적인 문제에 관하여 다소 고전적인 관념에 기초를 두면서, 대단히 절제된 공간적 틀 안에서 작업활동을 하고 있다. 문외한의 눈으로 보기에 이런 작품은 진부하며, 믿기 어려울 정도로 미니멀 아트적이거나 단순하게 보이며, 또 지루하다고 여겨질 것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세련되며, 그 표현이 뛰어나며, 하나의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오고 가면서, 각각의 미묘한 차이를 경험토록 해주고, 각 작품이 어떻게 아주 다른 감정과 시각적인 감수성을 내뿜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그의 작품은 눈을 즐겁게 해주는 성찬이다. 여러분이 준비만 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매번 상이한 방식으로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김일권은 모두 같은 크기와 같은 포맷으로 이런 작품을 200편 이상 그려 왔다. 이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인데, 그런데도 각각의 이미지는 신선하며, 각기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그는 다른 날에, 다른 계절에, 그리고 하루 중의 다른 시각에 이런 작업을 했다. 우리는 날이 바뀌면 얼마간은 다른 사람이 된다. 세계와 우리의 환경도 매일 다른 것이다. 김일권은 인간적인 경험의 이런 측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한국과 화가로서의 자신의 삶과 동료 인간들을 묘사함에 있어서, 그는 시각적인 대화를 통해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감상자와 공유하고자 한다. 한국 역사의 정수와 문화적 뿌리는 자연, 생명, 단순한 우아함, 감수성, 인간적 정감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런 한국 문화의 원초적인 요소가 김일권의 작품 속에 세밀히 표현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민감한 감수성을 보이며, 뛰어난 표현력을 나타내며, 감상자와 영적인 교감을 나눈다. “화가 중의 화가”라는 용어는 종종 “선구성” 미묘한 채색과 착색, 자신의 기예를 통해 진정으로 교감을 나누는 내재적인 수단에 통달한 자에게 쓰여지는 용어이다. 김일권은 이런 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의 기초채색, 바탕채색, 덧칠, 붓놀림과 착색은 홀연히 우리를 초대하고, 잡아끌며, 매혹시킨다. 그의 작품 속에서 대기, 혹은 하늘이 지구, 혹은 땅과 만나는 방식은 대지의 풍경이 지닌 두 측면을 “경계선”에 의해 경이롭게 절제하여 결합하고 있다. 나는 로드코의 작품과 그의 절제된 포맷을 생각하며, 그가 정말 정곡을 찔렀을 때 그의 작품이 얼마나 힘차게 다가왔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김일권의 작품은 이같은 의도를 갖고 있으며, 상당히 다르면서도 미묘한 방식으로, 그리고 자기 스스로 부과한 훨씬 더 절제된 포맷으로 이를 성취하고 있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감수성, 완고함과 끈기를 요구된다. 이런 경탄스러운 자질은 그의 창조적 정신의 기저이고, 이 예술가를 묘사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김일권 08-21
13 탈리아 브라코폴로스 박사 뉴욕시립대학교 교수, 큐레이터 인기글 김일권의 풍경에 나타난 덧칠하기와 장엄함 예술에서의 장엄함을 고트 로젠블룸은 낭만적 풍경에서 발견하는 무정형성, 경외감과 신비적 측면과 연결지었다. 김일권의 풍경은 어느 모로 보아도 신비적이고, 암시적이며, 다양한 가능성을 장엄하게 암시하는 점에서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부드러운 음영의 그의 그림은 표현 방식이 간략함에도, 그 복합성을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이렇게 덧칠하기와 덧그리기 혹은 덧입히기는 덧칠하기 효과로 불리운다. 언어학적 모델을 빌려 말하면, 기호로서의 그의 풍경은 반복을 통해서 의미를 찾는 다층적 상징주의로 감싸여져 있고, 상징된 의미체는 불안정한 전환을 겪게되며, 의미하는 것과 자리를 바꾸어 나간다. 기호로서의 김일권의 그림은 반복을 통해서 그 지시 대상을 계속하여 재창조해내며, 그럼으로써 그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그의 작품은 전경, 수평면/중간층, 배경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 비유적이고 추상적인 풍경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혹은, 그의 작품은 매개체가 중심자리를 차지한 감각과 채색의 연구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는 경건하고,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특성 때문에 그의 풍경에서 정신적인 요소를 읽어낼 수도 있다. 보통 비평가들이 말해 왔듯이 김일권의 작품을 추상적 표현주의 혹은 미니멀리즘으로만 보는 것은 곤란하다. 그것은 비유적인, 상징적인 의미라는 관점에서도 감상되어야 한다. 김일권의 그림에서 가장 가슴에 다가오는 측면은 복합적으로 짜여진 은밀한 비유적인 의미와 시각적인 예리함이 보는 이를 사로잡고, 보는 이의 정서와 교감한다는 점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간략히 표현된 황량했을 광활한 공간이 붓질을 통해서 드러난 작가의 손에 의해 온화해졌고, 인간화되어 있다. 이 감성적 화법은 <2003년 11월 12일>의 수평면에 보여지듯 차츰차츰 변화하는 짙은 채색과 결합하여 성운과 같은 모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의 개인적인 삶을 보면, 이런 장엄한 공간과 더불어, 화법과 질감에 나타나는 암시적이고 감각적인 측면은 정신적인 함축을 지니고 있다. 김일권은 한국의 도회지에서 자라났고, 그의 미술 교육과정에서 보이듯 인물과 자연을 그렸다. 대략 1992년까지 이런 작업을 해 오던 그는 학교에서 익힌 모델에서 멀어지면서 풍경화 기법을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인물에 관한 관심을 줄여나갔다. 그의 초기 작품은 어둡고, 칙칙하며, 보통은 외롭게 웅크린 인물이거나 전쟁으로 폐허가 된 풍경이었기 때문에, 작가는 그 이후에 전개한 경건한 풍경에서 심적인 위안을 찾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육체적인 차분함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내적인 평화를 선사하는 감각적이고, 색조가 고운, 조용하고, 영적인 풍경들이다. 그림 속의 공간은 고통스런 경험이 교착하여 깊게 퇴적되는 강한 중력이 작용하는 세계에서 고투하는 인간과 관련된 다층적인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열정이 넘치고 있지만, 그의 풍경으로부터 작가는 위안을 얻게 되고, 그 위안을 통해서 경험의 집합이라는 전체의 관점에서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큰 시야를 얻게 되었다. 이 도교적인 인생관의 범위는 거시적인 것으로, 이에 의하면 인간은 삼라만상 중에서 미미한 자리를 차지할 뿐이며, 거기서는 자연에 일치되게 사는 것이 미덕이다. <2003년 11월 30일>은 자두와 벚나무 빛이 다채롭게 채색된 풍경인데, 중간에 자그마한 수직적인 요소가 있다 - 이것은 작은 인간 존재일 수도 있고, 고깃배일 수도 있는데, 도교적인 시각에서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김일권은 겉으로는 화가로서의 초기의 추상적 표현주의 스타일과 연결된 듯이 보이지만, 그 자신과 그의 질료를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김일권은 풍경과의 관계를 전적으로 부인했던 마크 로쓰코의 관점에서 이해되곤 한다. 김일권은 위안과 인간 경험의 부가물로서 풍경을 보려는 개념적인 작업을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로쓰코는 자신의 작품을 단순한 풍경으로 보는 작업을 배척한다. 안나 샤브는 그녀의 저작, <마크 로쓰코: 추상화한 대상들> (2001)에서 많은 비평가들이 로쓰코의 작품을 풍경과 연계짓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런 해석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로쓰코가 (김일권과 마찬가지로) 도회지 환경에서 살았고, 시골에 내려가면 불편해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브는 로쓰코의 작품이 그래도 풍경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이런 해석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다. 로쓰코의 초기 작품은 샤브가 정당하게 주장하듯이 그의 후기 작품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던 구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런 구상은  그가 좋아했던 수직적 형태 안에서 추상적이며, 상징적인 직사각형을 포함하는 기호가 되었다. 김일권의 그림에 대해서도 유사한 주장을 펼칠 수 있다. 그는 전통적으로는 수평적으로 그려져 온 풍경에 수직적인 형태를 사용함으로써 우리에게 애매함을 제시하고 있다. 수직 방향은 인물화에 더 잘 어울리고, 김일권의 초기 인물화 시기를 고려해 본다면, 이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김일권은 이제는 인간의 존재를 작은 부가물로 축소시켰고, 이 부가물은 광대한 풍경과 결부되어, 우주적인 차원의 정서적인 담화를 이끌어 낸다. 그리고, 김일권은 물결치는 바다의 파도처럼, 혹은 반복되는 달콤한 후렴구처럼, 인간의 경험을 캔버스에 찍어 보인다. 김일권 08-21
12 라울 자무디오(Raul Zamudio) curator Liverpool Biennial, Venice Bi… 인기글 김일권: 회화에 있어서의 날자 현대 문학의 이정표라고 간주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732쪽에 이르는 대작인데, 이 소설은 1903년 6월 13일 하루 동안에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미로와 같이 뒤얽힌 서사시적인 이야기인 조이스의 소설에 축약된 시간은 밀도있게 이어지는 문학적인 수식을 통해 수없이 많은 갈래로 뻗어나간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탁월한 개념적인 작품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마 이에 필적할 만한 것을 미술계에서 찾는다면 ‘온 카와라’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일 것이다. 조이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카와라는 시간성을 주제로서 택하고, 이와 동시에 조이스처럼 순간을 연장시켜 영원한 어떤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곤잘레스-토레스는 시각(時刻)의 역사성을 보다 깊이 깨닫고 있고, 이는 개념적으로는 텍스트에 바탕을 두었던 <무제> 연작에 잘 드러나고 있다. 카와라가 어느 한 시각을 그려내고 있는 반면, 토레스의 <무제> 연작은 여러 시각을 연속적으로 다루고 있다. 카와라는 특정일을 그린 회화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그림은 단일한 색의 배경에 보통 흰색으로 그려진 어느 특정일을 표현한다. 그 특정일은 때로는 작품이 그려진 때를 나타내며, 때로는 그 시각(時刻)을 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 예컨대, 정치적인 사건, 개인적으로 기억할만한 순간, 역사적 성쇠의 의미있는 시점 등이 그 이유이다. 이런 방식에 비해서 곤잘레스-토레스의 “날자” 작품은 보다 분명히 정치적인 기록이고자 한다. 어느 작품을 보면, 그 날자는 오스카 와일드가 구속된 날로 시작하여, 대법원이 동성애를 불법화한 날, 동성애의 권리주장을 알렸던 뉴욕시의 스톤 월 폭동이 있던 날을 거쳐 에이즈 전염병이 시작된 해로 끝난다. 두 작가와 이들이 택한 날자 표현 전략은 겉으론 일상적으로 보여도 지적으로 치열하며 시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김일권의 최근 작품은 형식적으로 개념적으로 이런 작업 방식을 포함하고 있다. 김일권의 최근 작품을 보면, <2003년 1월 1일> <2003년 2월 16일><2003년 2월 30일> 등 제목이 날자로 이루어졌는데, 그 제목들이 아주 의외의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점을 즉시 깨닫게 되는데, 다른 한편, 그의 작품이 복잡한 것이라는 점도 알게 된다.    그의 작품들은 그림의 상단에 있는 옅은 음영의 광할한 면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데, 이 면은 구성 상 그림 하단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미묘하고, 어두운 색조에 의하여 지지되고 있다. 그림은 어떻게 제목에 밝혀진 바를 표현하거나 암시하는가? 그림을 하나의 내러티브로서 해석해 내는 유일한 길은 그림이 그려진 그 날에 일어난 일이 무엇일지를 헤쳐내어 보는 일이다; 그림 안에는 추상과 구상을 환기시키는 무엇이 있으면서도, 제목의 날자는 열려진 질문으로서 남아 있게 되며, 그 날자는 작품의 제목이 주는 수수께끼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야릇한 불안한 감정을 자아낸다. 다른 한편, 그림의 테두리 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있다: 물과 같은, 단일한 색의 들판이 한 줄 펼쳐지는데 이것은 인지될 수 있는 어떤 것을 추상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런 색채의 흐름과 함께 제시된 것이 날자이며, 날자는 회화 밖의 세계에 대한 지시자 혹은 표지이다. 그런데, 시간이란 추상체이다. 결국, 김일권이 그의 그림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시각적/언어적인 보로미안 고리이거나 뫼비우스의 띠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화가가 시간을 지시자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사유 과정에서 철학적인 고뇌를 거쳐, 생성된 어떤 것으로서, 그 효과는 마음의 눈으로 휘감고 돌린 뫼비우스의 띠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사실 상, 거의 모든 화가들이 그들의 작품에 날자를 적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보통 그 작품이 완성된 해에 날자를 적는다. 김일권이 어느 특정일을 사용하는 것을 보다 즉각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면, 날자는 단순히 그 작품이 만들어 진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마저도 숱한 가능성을 낳게 된다. 하루 하루라는 시간적 연속성 속에서 김일권의 예술적 노력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캔버스 위의 모든 표시는 깔끔하게, 시간적으로 배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실제적인 부차성은 김일권의 그림의 밑바탕을 이루는 철학적 엄밀성에 대해서 아무런 것도 밝혀주지 않는다. 콘잘레스-토레스에게서처럼, 김일권은 그림과의 연계양식을 감상자에게 옮겨 버린다; <2003년 1월 20일>이라고 명명된 그림을 보고 있는 이에게 그 날자가 의미하는 바란 무엇인가? 이 날, 숱한 사건이 일어났고, 감상하는 이는 기쁨, 슬픔, 희망, 폭력, 새생명과 죽음, 그 외에 긍정적, 부정적 의미를 띠는 인간사의 온갖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만일 김일권이 그의 그림에 미국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일어났던 날 중의 하루인 2001년 9월 11일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달리 말하면, 시간이란 투명한 것이 아니며, 시간은 우리가 투사하고자하는 우리의 욕망으로 넘쳐나는 하나의 구성물이다. 그러나, 김일권의 인식론적인 탐구는 그의 형식적이며 개념적인 작업을 기록하는 수 많은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림을 통해 김일권은 존재론적인 문제도 언급하고 있다. 김일권의 작품은 구상과 추상이라는 미학적인 양식을 훔쳐냄으로써 회화의 역사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는 압축과 확산, 지속과 순간, 실체적인 것과 비실체적인 것, 특정한 것과 배경이라는 이분법을 포함하는 하나의 개념적인 틀을 통해서 구상과 추상이라는 양극에 화답하고 있다. 그는 세계를 24시간이라는 기간 속에서 파악하고, 한정지움으로써 세계 속으로 넘어 흘러들어가게 만드는 하나의 회화양식을 제기하고 있다. 어떤 생물은 하루 동안 산다고 한다: 김일권의 “날자” 그림은 그것이 지칭하는 시간적인 명칭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생명력 있게 박동한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완성된 날과 감상된 날 사이에서 째깍거리는 시계처럼 멈추지 않고 진동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김일권 08-21
11 [생성중인 풍경]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인기글 김일권이 그린 '고요한 땅'연작은 침묵으로 절여진 세상의 한 풍경이다. 그곳에는 다만 풍경으로서의 아주 간략한 표식만이 흐릿하게 머물 뿐 그 외의 어떠한 요소들도 자리하고 있지 않다. 인공물이 철저하게 지워진 풍경, 인간의 자취나 삶의 흔적이 표백된 풍경인 것이다. 그저 하늘과 땅만이 크게 화면을 이등분해서 나누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수평선과 이를 경계로 분할된 커다란 색면 덩어리 뿐이다. 그것은 기하학으로 이루어진 자연인데 다만 그 기하학의 날카로움과 수학적인 분할이 색채에 의해 은연중 잠식되고 허물어지고 있다. 스푸마토로 절여지고 물든 풍경이다. 흐릿한 경계에 의해 하늘과 땅이, 하늘과 땅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풍경의 근원을 보여준다. 모든 세부적인 요소들을 말끔히 지우고 오로지 하늘과 땅만이 자리한 이 세계의 풍경이란 매우 함축적이고 추상적인 모습이다. 사실 기하학적 풍경이란, 기하학적 관찰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그 재현하는 주체에 대해서 어떤 정신적 규범을 요구한다. 재현대상에 덧붙는 모든 잉여적 형태, 장식적 형태는 사실 재현 주체의 감수성, 감정의 산물이기에 그렇다. 어떠한 감정의 분비물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기하학이고 추상인 셈이다. 그런데 김일권의 작업은 외형적으로 작가의 개인성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기하학의 내면화와 관련되어 보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자연에서 받은 감흥과 정서를 회화적인 대기감과 분위기로 만들어내려는 유혹을 함께 보여준다. 김일권은 우리 산하의 평범한 풍경을 소재로 삼았다. 보편적인 남도의 평야지대를 떠올려본다. 높은 하늘과 수평으로 길게 자리한 대지를 소재로 삼았다. 그것이 기하학의 탐구 대상이 된 것이다. 감각과 감정을 매혹하는 하늘과 땅의 경계와 구름, 공기의 충만함, 햇살과 안개, 대기의 덧없는 우연 자체에 매혹되기를 조심스레 거부하면서도 그에 한정 없이 빠져들고 한편으로는 그것간의 긴장된 대립, 혼합과 스침 등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자신의 육체와 감각으로 눈앞에 현존하는 막막한 자연의 피부를 더듬어 본다. 화면을 가르는 직선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접선인 동시에 기체의 공간과 고체의 공간 혹은 유체의 공간이 만나는, 분리되는 선이 되었다. 이 기하학적 구도는 일단 재현 대상의 정수를 탐색하기 위해, 현실의 양태에 부과된 자질구레함을 극단적으로 지웠다. 자연주의적 묘사인 일회적, 일화적 형상을 제거한 것이며 따라서 선과 면을 엄격하게 구축하여 변모하지 않는 형태만을 포착하고자 한 것이다. 순수한 조형적 질서만을 그려보이려는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질료로 보인다. 자연은 쉼없이 생성중이고 움직이고 살아 있고 흐르고 빛나고 흔들린다. 그 점이 이 작가가 매혹된 부분이다. 그래서 그 그림은 기하학이면서도 전통적인 구상화의 자연주의적 내음을 짙게 풍기고 그런가하면 진부한 사실주의의 상투형에서 멀리 떨어진 그런 그림이 되었다. 그 그림은 마치 마드 로드코의 그림 같아 보인다. 붓질만이 떨어대는 적막한 공명의 분위기가 비의적이기 까지 한 그림말이다. 따라서 색채의 바다만이 가늘게 진동하고 있다. 그러다 다시 그림을 바라보면 그것은 분명 숲이고 바다고 산자락이고 들녘이다.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교묘하게 그 둘 사이의 틈을 넘나드는 구상적 추상, 추상적 구상 그림 혹은 '구상적 미니멀리즘'이라고 할 만하다. 추상의 극단으로 빠지지 않고 구상의 진부함과 재현의 덫에 걸려들지 않으면서 여전히 한 폭의 그림, 회화를 통해 정신적인 울림이나 자연에서 받은 서정을 간직해서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이 그림은 한켠으로는 동양적 자연주의에 또 다른 한켠으로는 서구의 추상미술, 모노크롬에 빚진 것이다. 하늘과 땅만이 우리들의 시선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 하늘과 땅은 기묘한 대기감을 머금으면서 흐릿하고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서정성으로 물든 정신주의적 풍경화에 가까운 편이다. 화면의 3분의 1을 차지한 땅은 수평으로 길게 드러누워 있다. 그 위로 광활한 하늘이 자리하고 있는데 구름이 떠있거나 안개 자욱한 정경 혹은 뜨거운 태양 아래 녹아드는 풍경이다. 땅과 하늘을 매개로 해서 색채추상으로 인한 분위기와 서정성을 환기해주는 작업이다. 그러니까 풍경이긴 하지만 그 풍경은 구체적이고 의미에 걸려있는 그런 풍경, 땅이 아니라 단순한 매개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물론 그 같은 유장한 평야와 들녘의 풍경을 시정 넘치게 잡아보려는 의욕이 완전히 증발된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김일권의 그림은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풍경화의 소재를 빌어, 이를 차용해 미니멀리즘의 추상작업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 이 작가의 최근작에 기대를 갖게 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앞으로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될 것 같은 비디오 작업과도 관련된 것이다. 김일권 08-21
10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김선희,,,양은희 (미술사 박사) 뉴욕시립대 인기글 김일권의 ‘고요한 땅` 연작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는 색조와 비슷비슷해 보이는 풍경의 평범한 유화작품이다. 밋밋한 땅과 하늘 그리고 지평선으로 구성된 그의 회화는 얼핏 지루해 보이기까지 한다. 중요한 것은 그의 회화에서 연속성이라는 요소가 없다면 의미가 미약하고 단편적인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이 작업의 비범성은 마치 일기를 쓰듯 하루하루의 다른 경험과 감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가 그려낸 풍경들은 자연의 풍경보다는 오히려 심상적인 풍경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김일권의 고요한 세계 ,, 양은희 (미술사 박사) 뉴욕시립대 김일권의 고요한 세계 양은희 (미술사 박사) 뉴욕시립대1.   미술과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같은 몸인데 다른 얼굴을 보일 뿐이다. 이미 지난 세기동안 미술의 역사는 이 동전의 앞뒤와 같은 삶과의 관계를 인정했으며, 삶을 벗어난 미술은 무의미하게 말장난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40, 50년대 그린버그가 맹신했던 형식주의 미술은 인간의 삶을 배척하고 ‘미술을 위한 미술’을 주창했지만 그것의 운명적 종착점은 결국 물감과 캔버스였다. ‘회화를 위한 회화’는 재료를 물신화하게 되었고, 결국 재료의 한계 내에 봉착하고 말았다.   미술은 일상의 일부이며, 삶과 병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아 ‘무엇이든지 미술이 될 수 있다’는 식이 한 가지이고, 또 하나는 온 카와라처럼 진지하게, 삶을 받아들이며 일상을 기록하는 태도이다.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작가, 특히 앨런 카프로우, 클래스 올덴버그는 현대사회의 폐허물과 잔여물을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와서 삶의 흔적을 예술적 언어로 포장했다. 반면에 온 카와라는 자신의 삶의 세세한 변화를 조용하게 기록해왔다.   카와라는 아침에 일어난 시간, 신문에서 읽은 기사, 낮에 만난 사람 등을 하나하나 일기처럼 적는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일 외에도 ‘날짜 회화’ 또는 ‘일일 회화’라고 불리는 그림을 그리는데, 이 그림그리기는 그의 하루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모노크롬 캔버스를 테이블 위에 펼치고 위에 그날 날짜를 흰색으로 그래픽처럼 그리는 것이다. 하루에 한 작품을 그릴 수도 있고, 물론 몇날 며칠이고 아무런 그림도 그리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또 물감과 캔버스를 꺼내든다. 마치 며칠 동안 먹지 않았던 찌개를 끓여 먹듯이 다시 습관적 일상으로 돌아온다.   김일권은 카와라처럼 일상과 작업을 분리하지 않는 작가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회화에 그의 일상이 오롯이 녹아있다. 카와라처럼 그림의 제목에 그림을 그린 그날 날짜를 사용하는 것도 비슷하다. 간결한 수평선 하나가 캔버스 가운데를 가르는 그림으로 잘 알려진 김일권은 카와라처럼 비슷한 그림을 반복한다. 물론 색과 캔버스의 크기는 변하지만, 수평선 또는 수평적 구도로 화면을 가르는 추상 패턴을 반복한다. 그가 최근에 일관되게 그리는 수평적 색면은 사실 그가 사는 순천 앞바다 풍경을 캔버스로 담은 것이라고 한다. 순천. 서울에서 비교적 먼 이 곳의 일상은 여느 지방 도시처럼 느리고, 적막하며, 가끔 만나는 친구의 방문이 반가운 곳일 것이다. 그러나 서울처럼--아니면 카와라가 여행한 세계의 여느 도시에서처럼--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취침하는 일상이 반복되는 곳이기도 하다. 반복과 일상. 일상의 반복. 삶은 이 순환고리 속에서 느리게 그리고 인내를 통해 지속된다.   김일권은 카와라처럼 한 도시에만 사는 붙박이 작가는 아니다. 뉴욕을 거점으로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카와라는 사실 집 (house)이 있으면서도 집 (home)이 없다고 말한다. 김일권은 광주, 서울, 도쿄, 파리, 뉴욕 등 이미 여러 도시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뉴욕에서 미술을 공부하면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외국으로 자주 나간다. 그가 글로벌한 미술계를 두루 섭렵해왔다는 면에서 카와라와 비슷하다. 하지만 카와라는 고국인 일본의 언어를 작품에서 축출해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여정에서 마주친 언어로만 작품을 만든다. 심지어 일본어 대신에 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한 지역, 한 나라의 시민을 넘어서 ‘세계시민’이고자 애쓰는 작가이다. 김일권은 먼 나라로 여행을 다녀오더라도 자신의 회화에서 고향의 풍경을 고수하고 있다. 그에게 ‘세계시민’이란 명칭은 고향의 냄새와 비교해서 더 매력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고향의 바다. 그 원초적인 감각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그래서 묵묵히 그 바다를 그림에 담는다. 그건 인간으로서 그의 존재이유이자 미술작가로서의 존재이유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순천에서 사는 그의 일상이다. 오래 전부터 순천 사람들이 바다를 보면서 삶을 그렸듯이, 그도 바다를 보면서 삶을 그린다. 서울로, 그리고 뉴욕으로 아니면 다른 외국의 도시로 돌아다니더라도 그 일상은 이미 그의 존재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2.이런 이야기가 있다. 오래전, 아직 예술과 과학, 철학과 과학이 분리되지 않던 시절,  고대도시 바빌론에는 인근 지역에서 몰려온 지성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Adherents of Legominism”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구상에 거주하는 뛰어난 학자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로 발전되었다. 그들은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최고의 지식’을 얻음으로서 ‘자아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모여든 학자 중에 Aksharpanzia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어느 날 이 모임에서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안전하고 정확하게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면 인공적인 물건을 만드는 것 (즉 예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그 만들어진 물체를 통해서 후세가 지식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각적 물체는 한 세대의 성과를 후대에 보여주는 증거로 삼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의 연설을 듣고 고무된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보여주는 물건을 만들어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여러 사람의 머리와 손을 거쳐 나온 물건이었기에 당연히 다채로운 색, 형태, 기능을 가진 것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도 만들어온 물건이 너무 많아서, 한 번에 전시를 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효과적으로 운영하고자 불가피하게 여러 날에 걸쳐 전시를 하나씩 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시에 따라 물건을 분류해야 했는데, 시간에 따라, 그리고 종류별로 물건을 나누어야 했다. 그래서 전시는 일주일로 늘어났고,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날마다 다른 종류의 물건을 전시했다. 화요일은 건축 작품을 전시하는 날이었고, 수요일은 회화작품을 전시하는 날이었다. 이렇게 나누다보니 덩달아서 물건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효율적으로 분류하게 되었다.   이 전시는 당시 바빌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인간의 지각이 많이 쇠퇴하고 있어서 이를 믿을 수 없던 차에, 다양한 시각적 물건이 쏟아져 나온 것을 보고, 내친 김에 감각 중에서도 중요한 시각의 영역에 속하는 색채를 연구하기로 한다. 특히 흰색과 검은 색 사이의 다양한 채도를 이번 기회에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들의 의식이 고양되고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감각을 되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한때 화가들은 회색에서 1500개의 다른 채도를 찾아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각의 섬세함을 탐구하다보니, 예술은 처음에 지식의 세계에서 출발해서 감각의 영역과 연결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신비주의 철학자이자 종교이론가인 구르지예프의 철학적 소설 <Beezelbub's Tales to His Grandson> (1950)에서, 주인공 빌제법Beelzebub이라는 이가 자신의 손자 하세인Hassein에게 전해준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온 카와라가 좋아했던 작품이다. 바빌론 사람들이 한 일은 무엇일까?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요점은 이렇다. 인간의 삶은 자아를 발전하면서 완성된 삶을 산다. 그래서 ‘최고의 지식’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을 개인을 넘어 다음 세대에 지혜와 물려줄 의무가 있다. 바로 그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이 예술을 성취하는 과정과 같다. 삶과 예술의 일치가 여기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지식을 보여줄 시각적 증거로 나온 것이 바로 시각예술품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지식은 너무도 많은 시각적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보기 좋게, 이해하기 좋게, 그리고 인간이 누리는 시간 제도에 따라 분류할 필요가 생겨났다.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 감각의 영역과 지식의 영역이 처음부터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분리된 영역들이 생겨난 것이다. 바로 근대사회에 들어와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고대로 돌아가 보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가 보면, 인간의 삶은 예술과 괴리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예술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감각, 경험, 지식, 그리고 존재는 전달하는 것이다. 캔버스와 물감은 그것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카와라는 이 이야기에서 자신의 미술작업의 근간을 확인하고, 평생 동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기록하고, 이를 전달하고자 반복되는 과정을 살아왔다. 그는 19세에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사회 제도가 만든 어느 직업도 거부하고 오로지 예술가라는 고대부터 전해온 길만을 걷는다. 굶주림과 두 아이의 아버지라는 현실도 그 길을 멈추지 못했다. 1960년대 중반 이런 깨달음을 얻은 이후로 매일 그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스스로 깨달음에 도달한 그는 바로 “Adherents of Legominism”의 현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삶과 예술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김일권도 그 길을 가고 있다. 순천 앞 바다를 보면서 꾀를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그리고 가끔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면서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3.   김일권은 주로 바다, 산, 대지의 풍경을 그려왔다. 2003년경부터 등장한 풍경은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연에서 점차 추상적인 자연으로 변해갔다. 그런 중에 바다와 땅이 융합되고, 하늘과 대지가 서로 혼동되면서 이제는 바다 풍경인지 아니면 마음의 풍경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이다. 세계의 추상 미술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잘 아는 그가 이미 보편적인 미술 언어로 인정된 추상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가 뉴욕에서 거주하면서 알게 된 비평가들--로버트 모간, 로즈메리 오닐, 탈리아 브라초플러스--은 한결같이 그의 작품에 보이는 자연의 보편적 미와 공간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마크 로스코와 같은 정적인 그러면서도 초월적인 추상의 미를 추구했던 미국 작가와 비교하고 있다. 김일권의 작품에 로스코의 팔레트가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로스코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본다. 1950년대 이후 한국에서 전개된 추상 전통을 그가 모를 리 없다. 덩어리들이 엉킨 역동적 추상작품에서, 선의 반복적 활동을 담은 미묘한 모노크롬 회화까지, 김일권보다 앞서서 추상을 다룬 작가들을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는 동서양의 회화 전통을 공부한 사람이다. 초현실주의적인 생명체를 그리다가 이런 형체들을 추상화하면서 결국에는 부드러운 색면이 부유하는 추상을 통해 정신적인 주체를 표현했던 로스코의 추상과 외양은 비슷할지 몰라도 출발은 다르다. 김일권은 바다, 밤, 하늘, 땅과 같은 넓은 우주를 차근차근 그려서 결국 정련된 추상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형태만 정련한 것이 아니라, 붓의 움직임, 색채의 사용도 점점 절도있게 변해왔다.   김일권의 풍경은 단순한 수평 구도와 한두 가지 색을 이용한 모노크롬 색면의 결합을 통해 아직은 완전한 추상이 아니라, 푸른 바다와 척박한 대지가 서로를 포용하는 순천 앞바다 풍경이 정련되어 고즈넉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남해안에 자주 부는 비바람의 흔적조차도 수평선이 무너지는 안개 속처럼 그려진다. 푸른색과 붉은 색일 수도 있고, 녹두색과 갈색이 결합할 수도 있다. 수평적 구도에 가로로 뻗은 줄 하나, 둘이 화면을 가른다. 그리고 그 바다와 대지가 서로 녹아들어 가는 수평선은 그의 풍경에서 사실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둘이었던 색이 하나가 되는 지점이자, 하나였던 색이 둘로 나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의 풍경이 보여주는 드라마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수평선은 의도적으로 단순한 선 하나, 아니면 해안선과 같은 돌출된 부분이 느껴지는 선도 있다. 그 수평선이 갈등 관계를 극복한 듯이 소박하게 서로 어울리기도 한다. 이 선은 그의 그림이 완성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1년 365일, 태양과 달, 구름과 바람이 예고도 없이 매일 찾아오는 곳. 변화무쌍한 낮과 밤을 보면서도 김일권은 바람, 돌, 나무, 파도도 숨을 죽인 곳과 때를 골라 캔버스에 담았다. 그 숨죽임 가운데 드러나는 고요함이 남도의 여유로움인지 아니면 척박한 땅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시간 속에서 잊고자 하는 망각의 노력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물감이 지나치게 두텁지도 않고 얇지도 않은 것, 붓 자국이 절제되어 정직하게 움직인 것은 분명히 평온함을 담고자 한 흔적이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도도함이 엿보이는 것은 어쩌면 고향의 바다 앞에 서서 역사의 고통과 현세상의 흐름을 잊고, 더 큰 우주의 흐름 속에 자신의 존재를 맡기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고요의 땅. 그가 한때 사용하던 제목은 요즈음 사라졌지만 처음에 그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를 보여준다. 그 땅을 번잡스럽게 하는 인간과 혼잡한 감정의 교류, 욕망의 경쟁을 축출해버린 곳.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가 스치는 곳. 고요함은 문명과 먼 김일권의 영토를 정의하는 개념이다. 그곳은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곳이거나 아니면 그가 사람을 피해 온 곳일 것이다. 스스로가 먼지 한 톨처럼 느껴지는 넓은 대지와 그것을 에워싼 바다. 그런 영토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그는 그 생각과 느낌조차도 차단해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고요의 땅’이라는 제목은 사라지고 그가 그림을 그린 날짜만 제목으로 사용한다. 그는 이렇게 중성적인 제목을 통해 모든 연상, 추측, 그리고 가정을 막고 대신에 그림에만 집중하게 한다.   2005. 11. 20, 2006. 01. 20, 2006. 02 .01, 2006. 02. 02, 2006. 03. 30, 2006, 04. 02, 2006. 06. 10, 2006. 10. 29, 2006. 10. 30, 2006. 11. 21, 2006. 12. 31, 2007. 01. 25............................................................................................................................................이 숫자는 김일권이 작품 제목으로 사용한 것들이다. 그가 그림을 완성한 날의 날짜를 그대로 제목에 사용했다. 하루, 그리고 또 하루, 그리고 또 하루. 그림 한 점을 완성하려면 족히 한 달을 보내는 그는 마지막 날에 그림 제목을 정한다. 그 작품이 만들어질 때까지 흘러간 시간은 모두 그 제목에 들어간 날짜로 응축된다.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면서 선조가 쌓은 지혜를 전해주려던 할아버지 빌제법, 바빌론에서 후대에게 지식을 전달하고자 애쓰던 지식인들. 날마다 자신이 그림을 그린 날의 날짜를 캔버스에 그리는 카와라. 김일권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알고 있으며 자신에게 부여된 그 역할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 2006년 1월 20일...........2006년 2월 1일. 2006년 2월 2일.......2006년 3월 30일...2006년 4월 2일..............2006년 6월 10일........................2006년 10월 29일..2006년 10월 30일.............................2006년 11월 21일..............................................................................................................................................이 무수한 점 속에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은 인간의 일상을 삼키고, 고요히 흐르는 바다처럼 흘러간다. 어수선한 세월도, 번잡스러운 시간도, 영광스러운 순간도 모두 그 시간의 바다에 묻힌다. 그리고 작가도 묻힐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작가를 사라지게 하더라도 작품은 그 시간 속에서 지속된다. 바빌론에서부터 그랬듯이. 김일권 08-21
9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젊은모색전에서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학예연구관 장영준 인기글 김일권(金一權. 1962~ )은 단순하고 정제된 신구상적 경향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속에 용해되어있는 역사적, 정신적 흔적들을 시각화시켜 자연질서 속으로 재환기 시키는 함축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언뜻보면 음울하기까지한 무채색의 톤속에서 느껴지는 광기어린 번득임은 자신을 펼쳐 보임으로써 새로운 자아를 획득하려는 작가의 고통어린 표현의 한 자락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김일권 08-21
8 2003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오 광수 " 찾아가는 미술관 "에서 인기글 세부묘사가 사라진 화면위로 보이는 모습은 아득한 수평선이나 지평선같기도하다.수평선이나 지평선에대한 고정관념과 일치 하는듯, 어긋나는 듯하기도 한 공간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를 사색의 길로 안내하한다. 구상작가가 빠지기 쉬운 사유적 여백의 상실이라는 함정을 무난히벗어나고있다. 김일권 08-21
7 작가 노트 - 작업중에 , 뉴미디어론 2010 김일권, 분절 시간 통합 인기글 나는 그림을 그리는 자가 아니라 만드는 자이다. 나의 작품의 대부분에서 보여지는 단순하고 함축된 표현성은 늘 발견하는 일에, 나를 세상에 개방시키고 작업  과정 중에 생기는 미묘한 재료들의 감성들을 수용하고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내가 주로 다루는 미디어와의 물리적관계에서 이미지를 이해하기 쉽게 발견하고자 한다. 대상에 대한 본질적 모색은 모험 가운데 치밀한 표현력으로 표피적 사실성을 거부한 채 그 속에 영혼을 끌어들여 삶과 세상을 함축하여 메시지의 힘을 담아 환기시키고 싶다.   내 그림들은 구상적 미니멀리즘의 기후들로 가득 차 있다. 자연자체의 것이 아니라 감정의 사실로 자연 속에 질서를 설득력 있게 만들려 하고, 또한 그 속에는 물리적인 자리뿐만 아닌 정신적 공간과 함께 나의 삶 속에 녹아 내린 흔적을 찾아 확인하고 싶다.뉴미디어론 2010예술가는 무엇을 하는 이어야만 하는가 이것은 나의 항상 예술가로서의 그 근본적 본질을 얶메고있는 큰 짐을 지고있는 듯한 작가의 존립에 대한 근본적 하이라키(축)임에는 틀림이 없다. 예술의 가치는 늘 절대적인 것이 없다. 예술가는 절대적 가치에 도전하고 그 존재에 항상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내가 지금까지 늘 해오던 페인팅작업에는 그 무엇인가 아우라가 있었다 하지만 다다이후의 오브젝트의 재발견이아니라. 아도르노의 지침처럼 과거의 형식언어를 뛰어넘어  표현 오브젝트가 매체로서만이 아니라 미디어를 활용한 질료의 감성적 발견과 접목 여기에 더해진 새로운 가치의 완성을 통한 창조 작업인 것이다.오늘날 차세대 빛의 재료인 led에 부호화된 칩과 전자회로의 전류소통을 통해 문화 공간 내에서 보는 이와의 새로운 매체적 감성을 만나게 하고 싶다..이는 분명 빛의 색으로서 대기감의 표현이 가능하였고 천지의 함축성과 명상성, 명료성 변화되어지는 지속성 새로운 본질의 숭고한 가치성마저 찾고저 한다.분절 시간 통합 부분적이지만은 전체적 시간 내에서 분절화 되어지면서 통합적 시간의 여정으로 이미지 복사는 계속 진행된다. 즉 0의 시간이 0과1로 분리 되는 듯한 연속성의 이미지가 지속화되면서 생성한다. 그리고 점점 소멸된다.자신이 비추어진 스크린은 비어있는 시간의 모습만큼이나마 밀집된 다층적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성소멸 이미지는 정해진 짧은 시간으로 있음과 없음을 쉼 없이 계속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존재의 시각과 그다음의 인식과 성찰을 들쳐 내고자 하는 것이고 소외의 시간을 끊임없이 찾아 보이려는 포괄적 이미지의 무한 생성 반복 소멸이다.작가는 시간이 전개되는 느린 속도의 이미지의 반복적 재생을 통하여 자아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생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새로운 이미지 시간의 존재적 성찰과 아울러 또 하나의 다른 무한의 이미지를 얻고자 한다.시간에 대한 생각 부분적이지만은 전체적 시간 내에서 분절화 되어지면서 통합적 시간의 여정으로 이미지 복사는 계속 진행된다. 즉 0의 시간이0과1로 분리 되는 듯한 연속성의 이미지가 지속화되면서 생성한다. 그리고 점점 소멸된다.자신이 비추어진 스크린은 비어있는 시간의 모습만큼이나마 밀집된 다층적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성소멸 이미지는 정해진 짧은 시간으로 있음과 없음을 쉼 없이 계속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존재의 시각과 그다음의 인식과 성찰을 들쳐 내고자 하는 것이고 소외의 시간을 끊임없이 찾아 보이려는 포괄적 이미지의 무한 생성 반복 소멸이다.작가는 시간이 전개되는 느린 속도의 이미지의 반복적 재생을 통하여 자아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생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새로운 이미지 시간의 존재적 성찰과 아울러 또 하나의 다른 무한의 이미지를 얻고자 한다.> caption   시간에 대한 생각  answer for times지역문화 살리기 저는 문화 전문가 특히 예술쪽 입니다.예술문화적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문화가 없기 때문이ㅏ 문화가 있지만 활력과 역동성이없어 엔진 ㅁ력수가 딸리기 때문이다 그이유는 모던한 시각에서 현대적 삶을 살기 때문이다.현대라는 것은 지금 이시대적 문화 모드가 자리하고 잇기 때문이다.마치 생각은 386 마더보드에 윈도우 xp 소프트웨어에는 90년도 사용하던 프로그램 들을 깔아 사용 하기 때문이다.즉 잘 맞지않아 성능 발휘가 안되기 때문이다.하드웨어도  여러 종류이다. 회사마다 질들이 다르다.즉 우리사회에는  문화적 하드웨어와 질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우리도시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창의적인 질또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익숙한 문화적 볼거리 차별화되지 못한 도시문화 시장에 출마한 어느 한사람이 예술인들이 모이는 자리에와 예술가들을 위한 시책을 펼쳐야한다고 주장한다.참으로 우스운 발언이다....지금 까지의 그 문화시책은 혜택받는 몇몇 소수들만의 것이었고  더큰 더많은 시민들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였다.차라리 불우이웃돕기가 더 좋은 방법이 아닌가........지금 우리지역의 예술가들은 어렵게 지탱하고있다.참으로 안타깝다.그렇다고 그들에게 고기를 잡아줘서는 안된다.왜냐하면  그때는 좋을 지 모른다...몇년지나면 그때 뿐이다.지금까지 그리해서 이지경에 이르지않나 생각한다. ..   무엇이 그들을위한 지속가능한 시책인가를 고민해야만 한다.그것의 연구목표는 좀더 많은 공익성과 공공성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한다..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그들  스스로 자생력을 지녀 더욱더 자립의길로 인도해야할것이다.좀더 더나은 문화적해법은 차별화된 전략과 전술만이 이를 실천하는 것이 될것이다. 김일권 08-21
6 중앙일보사-월간미술 review에서 조성관 기자1996,1월호, 월간 미술세계review에서 1996년 1월… 인기글 중앙일보사-월간미술 review에서 조성관 기자1996,1월호,세기말적인 혼란과 전쟁의 소용돌이가 한바탕 휘몰아쳤다 물러난 정경이다. 가슴을 저미는 적막감이 화면 위를 흐른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바다가 보인다. 그러다가 사라진다, <고요한 땅>에는 '영혼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엄숙함이 담겨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연만이 존재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다시 보면 인간이 느껴진다.인간의 영혼이 엿 보인다.운명과 대자연 앞에서 무력하고 고독하다. 어찌할 수 없이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인간' 이다.   전남 순천 출신의 풍경화가였던 김일권은 뉴욕으로의 유학을 통해 구상적 미니멀리즘 화법을 체득한 것 같다. 세부 묘사는 사라지고 단순화된 화면이 주조를 이룬다. 어두운 땅과 회색빛 하늘에선 사유와 관념의 세계가 엿보인다. 거대도시 한가운데 던져져 체험한 극심한 문화적 혼란이 그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셈이다.   에릭 피술과 빈센트 데시데리오에게서 사사를 받은 그가 한국적인 바탕 위에 뉴웨이브풍으로 그려내는 또다른  소재는 인체다. 목탄을 사용해 거침없이 그려내 인체 누드에선 절규가 들려온다. 인체 역시 단순한 색면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정된 구도와 역동적인 움직임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결국김일권의 풍경과 인체는 서로 다름이 아님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대자연에 던져진 인간 실존의 탐구에 몰입해 있다. 평화 속의 불안, 불안 속의 평화가 그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이다. 이제 그는 풍경이든 인체든 형상을 더욱 단순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새롭게 승화된 남도화의 관념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월간 미술세계review에서 1996년 1월호 뉴욕미술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고,은유적인 구상적 미니멀리즘을 고집해온 작가 김일권씨의다섯번째의 개인전이 열렸다.인간과 땅을 주제로 표현을 함축적으로 재료와기법 사이의 물리적관계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아닌 만드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죄악으로 가득찬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고 있고 세상을 정신적공간으로서 가득찬 풍경과 인간을 끌어 들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그의 시각으로 제조명하여 또다른 이미지로 전달해 주고있다. 김일권 08-21
5 문학박사 김길수(순천대학교 교수, 연극 평론가) 인기글 자연과 예술, 안정과 움직임의 긴장미 자연은 예술의 또 다른 일면이라는 시인 릴케의 말이 김일권의 자연 풍경에서 떠오른다.<고요한 땅>, <그곳에서>, <평화>,<눈>과 같은 풍경은 일상의 현실이나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복사 내지 모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그럼에도 그의 작품은 우리 일상인에게 심미적 쾌감을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황금분할의 구도를 존중하면서도 그는 탄성력있게 그 구도를 변주시켜 놓았다. 변용의 폭은 우리의 의표를 지르면서도 다양하게 확대된다. 자연은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온통 짙은 밤색 계열의 색채가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하늘은 제 의미를 상실해 오고 대지 역시 어두운 절망의 한 단면을 일깨워 준다.사물들 간의 일상적인 교호 작용은 차단된 채 그들은 각기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구상과 추상의 과감한 연결과 교차는 불감증으로 얼룩진 자연모방의 풍경화 풍토에 대한 강렬한 거부이자 반항인지도 모른다.그는 어쩌면 반 모더니즘계열 만을 고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름은 마치 신의 무서운 심판을 상징하듯 살아 움직이며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의 영혼을 강타한다. 풍경속의 대지 그 어느 곳에서도 자연의 포근함을 느낄 수 없다. 자연은 오히려 미움과 시기, 좌절과 불안 속에 허우적거리는 우리 인간의 숙명을 반영하고 있다.이제 그가 그린 인간 육체를 살펴보자. <인간>이란 제목의 몇 개의 그림에서 우리는 구체적인 삶의 단면을 읽어 내기는 힘들다. 표정 드러내기를 거부한 채 김일권은 모든 것을 육체의 표면으로 이야기하려한다. 마치 로댕의 조각 작품에서 수많은 살아 움직이는 표면의 운동을 읽어 볼 수 있듯이 김일권이 창조해낸 육체에선 안정과 움직임 사이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된다. 이같은 긴장감은 "저건 무엇인가?"하는 단순한 물음에서 "저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되었을까?" 하는 다양한 성찰 행위를 감상층 모두에게서 이끌어 낸다. 인간의 육체는 모든 사물들 중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간주될 수 있다.그러나 김일권의 인간들은 감각적이거나 표피적인 아름다움에 머물러 있지 않다. 여기에는 오히려 작가의 강렬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인간이 끊임없는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그의 육체 역시 표면의 만남에서 시작하여 의식속으로 스며 들어와 메시지와 관련된 메타퍼의 영역을 확대시켜 놓는다. < 인간 Human 1991>은 서 있는 입상을 보여주지만 이 입상의 모습에서 우린 그 어떤 건강한 사고나 동적인 활력을 찾기 힘들다. 이는 헝클어진 현실에 찌들린 우리의 자화상을 일면 조망하도록 해준다. 검붉은 배경에 흘러내린 물감 처리는 황폐한 곳으로 내팽개쳐진 채 삶의 희망 마져 박탈당한, 상처로 얼룩진 영혼을 상징적으로 일깨워 준다. 김일권 08-21
4 초대 개인전에서 김인환(미술평론가) 인기글 그의 그림에서는 사람의 모습이 많이 비친다. 일종의 [해부학적 인간]이랄 수 있는 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에서처럼 벌거벗겨지고 육체골격이 드러난 인체형상.[인간]이 그의 작품 속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큰 발견이다. 그의 바뀜이다. 그의 [인간]에 속도가 가해지게 된 것은 그가 적어도 머릿속으로는 어눌하지 않은 탓이다. 그는 세상을보고 있다. 민첩하지는 않더라도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상황을 안다. 별 것 아닌 단순한 인체그림을 통해서 그러한 온갖 잡다한 상념들을 간추리려고 한다. 그림기법이나 화풍도 얼마만큼 세련되어진 것 같다. 그 거치른 터치와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김일권의 작품에는 형상이 있다가도 없어지곤 한다. 인체라는 형상이 풍경으로 바뀌었을 때에는 때로는 추상적으로 변조되는 것 같다. 거기에는 율동도 없다. 저것이 하늘이고 이것이 땅인가 할 정도의 단지 수평으로 어떤 무엇을 암시적으로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관조의 세계이다.   이 작가가 그리는 인체란 단지 미적 표적은 아닌 것 같다. 그 형태를 빌려 표출하는 역동감이란 그의 감성이 움직임이며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절규일지도 모른다. 체험끝에 경험으로서 분출된 것, 예술이란 어디까지나 경험의 소산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고요한 땅]이라는 제명이 붙은 일련의 작품은 단순한 풍경의 차원을 떠나 모종의 문명적 위기의식과 불안감을 자아내는, 또는 강렬한 존재감을 야기시키는 그림이다. 흑백대비의 빛의 첨예한 대립적인 설정에 의해 긴장을 고조시키며 찰나적인 분위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영혼을 불러들이는 듯한](미술평론가 도로시 홀의 평문 인용) 풍경화라는 해석 역시 적절하다. 인체그림의 연장선상에서 풍경의 세계를 통해 작가는 아주 함축된 삶의 메시지를 환기시킨다. 김일권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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